'후천선경 건설의 진주眞主 도수' 그 발자취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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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중순 취재진은 고부 와룡리와 운산리를 찾았다.
상제님 9년 천지공사에서 가장 핵심을 이루는
한 천지공사의 현장을 찾아보기 위함이었다.
막상 현장에 도착하니 당시의 모습은 모두 변하고
그저 산천과 하늘만이 예전과 같이 있을 뿐
모든 것은 변해 있었다.
천지공사에 수종들었던 성도님들의 집은
모두 사라지거나 현대식으로 바뀌었으며,
옛 자취는 찾을 길이 없었다.


'백의군왕 백의장상 도수'가 아니라 '후천선경건설의 진주(眞主) 도수'


도기 132년 양력 1월 6일, 증산도대학교 1월 교육은 해외 및 국내의 많은 신도들에게 큰 은혜가 내려진 날이다. 그것은 그 동안 '백의군왕 백의장상 도수'로 알아오던 정미(丁未, 1907)년 12월의 대공사가 '후천선경건설의 진주(眞主) 도수'임을 사부님께서 바로 잡아주시고, 이로 인해 그 공사의 의의와 정신, 그리고 일꾼들에게 내려주신 심법전수의 내용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도전』을 읽어보면 상제님이 처결하신 많은 공사 가운데 큰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이 하나 둘이 아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천지공사 집행 100년이 되는 2002년의 첫머리에 사부님께서 가르침을 바로 잡아주신 이 '후천선경건설의 진주(眞主)도수'는 우리 일꾼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너무도 큰 공사이다.


상제님께서 몸소 감옥에 들어가시어 집행하신 대공사


한평생 일신의 안녕(安寧)을 구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세계 창생의 행복을 위하여 아낌없는 희생과 봉사, 대속의 길을 걸으신 상제님의 거룩하신 생애는 이 1907년 12월 26일에 시작된 '진주(眞主) 도수' 공사에서 절정을 이룬다.

상제님께서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악독했던 일본 제국주의의 감옥소에 잡혀 들어가시어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으시며 공사를 집행하신다. 상투가 대들보에 매여 달린 채 순검들이 사정없이 내리치는 죽검으로 맞으시다 마침내 안구가 튀어나오고, 그 고통을 참지 못해 혀를 물고 혼절하시는 상제님! 왜 전능하시고 무소불위하신 대권능을 가지신 상제님께서 이렇게 엄청난 고욕(苦辱)을 당하시며 이 공사를 보셨던 것일까?
상제님께서는 공사를 집행하신 지 5일째 되는 날 저녁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믐날 저녁에 우레와 번개가 크게 일어나거늘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는 서양에서 천자신(天子神)이 넘어옴이니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이제 천자신은 넘어왔으나 너희들이 혈심을 가지지 못하였으므로 장상신(將相神)이 응하지 아니하노라." 하시니라. (道典 5:157:1∼2)

상제님은 죽음도 뛰어넘는 일심을 보이시어 천자신이 넘어 왔지만, 상제님과 함께 감옥에 들어갔던 성도들이 혈심을 갖지 못해서 장상신이 응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1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인사로 전개되는 현실을 바라보면 이 공사는 우리 일꾼들에게 너무도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와룡리의 문공신 성도



당시 상제님은 운산리와 와룡리를 오가시면서 이 공사를 집행하기 시작하셨는데, 그 곳에는 문공신, 신경수, 황응종 등이 살고 있었다.
문공신 성도는 상제님께서 순창 농바우에서 사흘간 기다리셨다가 만나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가 준비되어 있던 일꾼임을 짐작할 수 있다.

문공신 성도는 일찍부터 도를 구하여 불교, 천주교를 신앙하고 동학신도가 되어 16세에 동학혁명에 가담하기도 하였으나 모두 길이 아닌 듯하여 태인 관왕묘에서 참선생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된다. 기도 6일째 되는 날 관운장이 나타나 '향남방 하라'는 말을 하고 사라지는 체험을 한다. 그는 관운장의 계시를 풀지 못하다가 김제의 처가동네에 사는 한 친구로부터 순창 농바우에 계신 상제님 소식을 알게되고 드디어 정미년(1907년) 가을 상제님을 만나 뵙고 모시는 영광을 얻게 된다.

문공신 성도는 "공사를 보는데 돈 천냥이 필요하니 누가 돈 천냥을 대겠느냐"는 상제님의 말씀에 즉시 천지공사 경비로 천 냥을 올릴 정도로 신심이 돈독하고 구도의 정열이 남달랐다. 당시 4백여 석의 재산을 상제님의 천지공사에 모두 바쳤던 것이다.


후에 7년 동안 형무소살이를 하다



감옥에 계실 때 다른 성도들은 다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고 상제님과 문공신 성도만 남게 된다. 이때 상제님은 공신에게 "너는 자식이라도 있지 않느냐…. 나는 자식이 없으니 누가 찾을 것이냐. 내 몸이 조선을 떠나면 안 되느니라. 내가 죽은 뒤에 백골이라도 전라도에 묻혀야 할 것 아니냐."고 말씀 하셨다. 문공신 성도는 이 말씀을 새겨듣고 상제님의 자식이 될 것을 결심하였다 한다. 상제님은 당신의 어천(御天) 후에 일어날 성골도굴 사건을 미리 내다보시고 그 때의 일을 조처하도록 당부하신 것이다.

상제님 어천 이후 1921년, 조철제가 도통에 눈이 어두워 상제님의 성골을 도굴해 통사동 이준세 재실에 숨겨 놓자 문공신 성도는 상제님의 옛적 말씀이 이 일을 경계하신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는 조철제가 탈취한 상제님의 성골을 찾기 위해 기운 센 장정 20여 명을 대동하고 재실을 찾아가 성골을 찾는다. 그런데 이 와중에 도망친 조철제를 쫓아 태전까지 왔다가는 오히려 조철제가 금괴까지 잃어버렸다고 살인미수에 강도죄로 고발하게 되니, 문공신 성도는 7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형을 치른 것이다. 문공신 성도는 49세에 옥살이를 시작하여 7년 동안 갖은 고생을 다하고 출옥하였는데도 신앙심이 변하기는커녕 더욱 돈독해져서 79세에 작고하기까지 일심으로 상제님을 신앙하였다.


운산리 신경수 성도와 와룡리 황응종 성도


이 공사에서 살펴볼 또 한 분의 성도가 운산리(雲山里)의 신경수 성도다. 당시 신경수 성도는 70세의 나이로 상제님 성도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분이셨다. 신경수 성도는 본래 동학을 신봉하였고 문공신 성도가 책임자로 있는 그 지역 일진회 회원으로서 오랜 동안 문공신 성도와는 한 마을에서 잘 알고 지낸 사이였다.

황응종 성도는 딸이 객망리 강씨 문중으로 시집을 갔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상제님과 성부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상제님이 정씨부인과 인연을 끊게 되는 갑진년(1904)에 그는 성부님의 심부름을 하게 되었다. 그가 정식으로 상제님을 따르며 천지공사에 참여한 것은 정미년(1907) 가을 경으로 당시 67세였다. 키가 작고 성품이 괄괄하여, 호랑이 양반이라고 주위에서 부를 정도로 동네에서나 집안사람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무서워했다고 한다.